우리는 남을 용서하라는 말은 자주 듣게 되지만 자기를 용서하라는 말은 듣기가 쉽지 않다.  자기 용서는 마치 자기잘못에 대한 변명이나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용서하는 것은 남의 부족과 실수를 용서하는 만큼 역시 중요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잣대로 이웃을 판단하게 되고 남을 비난하기 쉽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이며, 남에 대한 관대함을 갖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수년전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신체적 고통과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어떤 분을 만난적이 있는데, 오래 전에 이혼 할 때 지인으로부터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저주같은 말을 들었는데 그 말대로 현재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했다. 마치 자신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뉘앙스를 가진 말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결혼생활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이혼 역시 혼자만의 책임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치않는 이혼에 따른 분노에서 나온 부당한 비난이 지금도 가슴속에 깊이 남아서 자신을 정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힘들때면 현재에서  해답을 찾기 보다는 지나간 과거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이전에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현재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지, 심지어 전생의 업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원인과 결과라는 우주적인 법칙을 무시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인과의 법칙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실과 같다고 볼 수 없다. 더욱이 해답을 찾는 동기 자체가 자신의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실보다 부정적인 관점을 쉽게 떠올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과거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없다. 현재 문제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게 되면 그 불완전성 때문에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는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한계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실수를 하고 본의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이혼 역시 이런 우리의 부족함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우리는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부족함에 의해서 일어난 일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실수를 하는셈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남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는 것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불안일 것이다.  무의식속에 있는 생존본능인 불안은 강한 자기 보호본능을 갖고 있어서 항상 긍정적인 현상보다 부정적인 현상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귀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취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한다. 사실, 쉽게 남을비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미안하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내면을 보면 자기불안이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그 꾀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고, 혹은 반대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비난을 하게 된다.  현재 문제를 마치 과거의 잘못과 연관시키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현재 문제를 보지 않고 피하려는 무의식속의 불안일 것이다. 사실, 지나간 것은 항상 지식이라는 정보로 남으며,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는냐는 현재 나에게 달려 있다. 현재 행복해지고 싶다면 굳이 과거 지식으로 현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보다, 어떻게 현재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것인지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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